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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수당전쟁 당시 고구려 강역도 수.당과 고구려간 전쟁은 그래도 명확한 편이다. 하북성이나 요서군에서의 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고구려의 방어선인 천리장성과 삼국사기> 및 수.당이 기록한 전쟁기록들을 보면, 아래 그림들이 대체로 맞다고 보여진다. 민족사학중에서도 하북성과 요서군 기록들을 주장하는 데, 이는 모용외의 요서군 도하현과 창려군 도하현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략>의 서천왕 5년(AD274) 기록과 같이 AD276년 서진(西晉)의 평주(平州) 교치에 따른 것으로서 고구려와 모용외간 봉상왕때 고노자와의 국북신성 전투 및 요동의 전투기록을 살펴보면 전선(戰線)이 대릉하(大陵河)를 넘어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북쪽 경계는 장수왕때를 보더라도 더 넓었으리라 생각된다. 도표 7-8-1> 고수1차전쟁시(AD598).. 2026. 9. 23.
7-7.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때의 최대강역도 광개토대왕때의 서진최대강역은 용성(朝陽)을 공격하긴 하였으나 점령하고 통치하진 못하였다. 숙거(宿車, 北鎭)와 점선, 평곽 등을 통치한 것으로 사료되며 대릉하를 경계로 볼 수 있겠다. 장수왕 21년(AD434) 4월, 풍홍이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더니 상은 “북위의 탁발도가 내게는 그대의 땅을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 몰래 자신은 침식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쥐새끼나 무엇이 다르겠소. 요수(遼隧)의 서쪽은 짐이 알아야 할 바 아니나, 만약 용성을 침입하면 짐이 토벌할 것이오”라 일렀다. 즉, 대릉하 동쪽은 광개토대왕이후 고구려땅이란 말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왕이 직접통치하는 국내(수도 인근 포함)와 자몽땅과 같이 거수국왕들이 다스리고 고구려성채가 있는 간접통치구역, 그리고 실위나 물길과 .. 2026. 9. 23.
7-6. 고국천왕과 산상왕 당시 고구려 강역도 고국천왕 당시에는 태조왕 이후 그렇게 빼앗기지는 않았으며, 공손도가 고국천왕 15년(AD193) 2월, 부산(富山)의 즉홀백(則忽白) 등이 최체와 개마를 침략하였을 때 공손도가 싸움을 돕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자체 무력으로 적을 치자 즉홀백 등은 막북으로 도망갔던 의 기록이 있다. 이에 비해 앞의 절에서 보듯, 산상왕은 AD197년 재위 원년에 갖고 있던 고구려 서부 지역(자몽, 서안평, 평곽, 둔유와 최체, 퉁랴오, 장령, 북하성, 개마 등)을 모조리 공손도에 빼앗기고 만다. 공손찬의 근거지(주근거지는 계薊, 북경인근)였던 요동속국은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요동속국은 전한 요서군 속현 셋(古屬遼西: 창료, 빈도, 도하)과 요동군 속현 셋(古屬遼東: 무려, 험독, 방)을 떼어 만.. 2026. 9. 23.
7-5. 기리영전투 당시 동천왕의 고구려강역과 조위점령 낙랑국.대방국 기리영전투관련, 삼국사> 경초년간(237~239) 위서 동이전과 삼국사기> 및 사략>, 예(濊), 마한소국 위치 비교시 위 도표의 담기양이 만든 중국역사지도집의 전한지도(진秦~진晉 포함)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산상왕 당시 요동반도의 내지(內地)는 고구려땅이었으며 동천왕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광무제의 바다건너 낙랑침입은 중국사서나 사략>에는 없고 삼국사기>에만 있으나 착각한 것인지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그러나, 기리영전투기록은 3개의 사서에 다 공통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대동강과 황해도 지역에 일정기간 들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리영전투기록은 삼국사 위서 동이전 한조> 및 삼국사기>와 사략>에 부분적으로 기록되었고 경초년간(237~239)에 위명제가 수군으로 바.. 2026. 9. 23.
7-4. 산상왕 당시 요동국과 고구려의 강역도 4. 산상왕 당시 요동국과 고구려의 강역도 가. 수암옥과 요동반도 점령여부 후에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되는 을불(乙弗)이 봉상왕 7년에 점선(秥蟬)에서 잡혀 함거에 실려 경도(京都)로 올라가다 주장(酒醬)땅에서 흉작에 따른 민란이 일어나 을불을 도주케 하는 아래 사건과 관련하여 관구검침략(AD246)이후 당시의 고구려 서변(西邊) 강역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사략> 봉상왕 7년(AD298) 반옥령(班玉岺;板玉岺?) 청옥(靑玉, 무늬 반옥斑玉 포함)을 서천(西川)으로 날랐는 데, 사람마다 옥판(玉板) 두 개씩을 짊어졌고 죽은 사람 역시 많았다. 옥판을 깨트려 죄를 받은 사람이 하루에 백여 명이나 되었더니, 민란이 일어나 군(軍)과 관(官)도 막을 수 없었다. 을불(乙弗)을 실은 함거가 주장(酒醬)땅에.. 2026. 9. 23.
Ⅲ-6. The territory of King Gogugwon's reign, at the time of Murong Huang's invasion In the 17th year of King Micheon (316 AD), during the first lunar month of spring, So-u (蕭友) was appointed as Nambu Daesaja (Grand Envoy of the Southern District), Yu Jang-gu (劉長句) as Governor of Jeomseon (粘蟬, Banshan border), Bu Seung (芙昇) as Governor of Macheon (馬川), Ju Dam (周淡) as Governor of Nangnang(Lelang 樂浪), Cheong Gyeon (靑見) as Jwabo (Left Counselor), U Pung (于豊) as Ubo (Right Counselor.. 2026.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