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출애굽(이집트)

세심 엄용식 2011. 12. 12. 15:11

출애굽(이집트)

 

출발하기 나흘전에 갑자기 성경투어라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회원 14명중 6명이

한 가족인 데 가장되시는 분이 암으로 판명되어 부득이 여행을 취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번에 못가게 되나 보다 생각하고 전화를 받고 있으려니 여행사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성지순례여행은 진행한다고 말씀하셔서 무척 감사하였다. 주님께서 도와주신

것같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출애굽여정에서의 이집트관광은 특별했다. 이 나라의 오래된 역사와 현재의 사는 모

습과 성지순례의 목적지인 이스라엘과 관련된 얘기들을 세 꼭지로 하여 이야기를 풀

어 보려 한다.

 

우선 인천공항에서 카이로까지는 타시겐트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었는

데 타시겐트까지 9시간 반, 트랜지트 2시간, 다시 카이로까지 6시간이니 미국 뉴욕

까지 가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린 것 같았다. 타시겐트공항의 트랜짓이 무척 불편했는

데 아직 개발도상국가라 그런가 보다. 그 넓은 대기실에 화장실이 한 곳뿐이고 그것도

 3칸 가지고 그 많은 승객들이 써야 하니 그 혼란이 대충 심한 기억뿐이다.

 

 

<그림1>유리창 곳곳에 놓인 선인장 종류                    <그림2>타시겐트공항의 부족해 보이는 화장실

 

다시 카이로를 향하여 가다가 밤10시 반경 지친 몸을 이끌고 비행장 트랩에 내려 수속

을 밟고 호텔로 향하였는 데 그 곳은 피라미드호텔이었다.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어적지로 잠을 청한 뒤 wake-up call로 일어나 아침먹고 길을 나서는 데 이집트 카이로

시내 특징이 곧바로 눈에 띈다. 베트남의 하노이 등은 공산당 치하에 4m*10m규격화된

 집이 특징이더니 카이로는 무질서한 교통과 준공이 안된 공동주택들이 특징이었다.

 

 

 

 <그림3>한국인들이 이용하던 피라미드호텔                <그림4> 피라미드호텔내부 도로로 깨끗한 편이다.

 

도로에서 우선 보이는 건 일반적으로 아파트 등 공동주택과 차량 등인 데, 집마다 미준

공상태라 놀랬다. 물어 보니 가이드 얘기가 세금이 비싸서 준공하고 사는 이들이 없단다.

가끔 가다 보니 보이길래 그건 뭐냐고 하니 공공건물 같은 것들이란다. 생활수준이 낮아

아직 피라미드 같은 관광지마다 1dollar를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 크게 들리는 실정

이다.

 

 

 

<그림5>세금 때문에 허가안내고 사는 공동주택들      <그림6>일방향도로에 역주행하는 버스가 위태롭다.

 

인구 2000만명, 600만대인 카이로 도로에 차선이 없다. 깜짝 놀라 물어 보니, 여기는

그렇단다. 알아서 가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데 일견 수긍이 가면서도 분리차선마저

없다는 데에는 고개가 갸웃둥 해졌다. <그림6>에서 보듯 길이 너무 막히니까 우리 버스

가 역방향으로 진입하였는 데에도 별 제지를 받지 않았다. 깜짝 놀라 이거 되는 거냐

니까 문제없다며 슬그머니 우회전해 올바른 방향으로 버스를 몰고 가는 데 질색이 돼

 우리나라는 교통법이 그나마 엄격한 나라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차선이 있거나 없거나 집위에 철근이 올라간 채로 살고 있는 집들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차는 어느 새 피라미드 국립공원에 도착하였는 데, 카이로근처였고 기자피라미드와 스핑

크스를 건축한 돌들의 규모(피라미드당 2.5/ * 230만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7>쿠푸왕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공원입구            <그림8>쿠푸왕 무덤입구로 손상된 모습이 보인다.

 

 기자피라미드를 보면서, 오전에 본 이집트중앙박물관을 생각하며 희한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왜 이집트역사는 중왕국이 고왕국보다 모든 기술면에서 퇴보하였는가?

 이집트의 역사는 기자 피라미드 등이 지어졌던 고왕국시대(5200년전~4100년전), 아브람

과 요셉이 살았던 유사년대인 중왕국시대(3500년전~4100년전), 출애굽이 있었던 신왕국

시대(3500년전~2600년전)으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는 25000년의 태고왕국

이 있었다고 하는 데 역사기록물로 제대로 남은 것은 별로 없어 빼고 말이다.

 

톰 행콕이 지은 신의 지문이라는 책에 보면 당시 그리스에서 방문했던 역사가 헤로도투스

는 헬리오폴리스의 신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 기간에

태양이 다른 장소에서 뜨는 것이 네 번 있었다고 한다. 두 번은 현재 지고 있는 곳에서 떴고

두 번은 현재 뜨고 있는 곳에서 졌다”면서 이 기간이란 말이 고왕국 이전에 역사가 있었던

기간이라고 하는 데,

 

 

<그림9>피라미드내 오리온좌향 통로와 이동로           <그림10>돌을 파서 만든 고왕국시대 돌항아리종류

 

<그림9>에서 보듯 쿠푸왕의 피라미드내 1만년전 오리온좌를 정확히 겨냥한 통로와

카프라왕 피라미드 꼭대기의 외장식석, 섬록암(강옥에 해당)을 깎아 만든 카프라왕 등

의 흉상, 피라미드내 석관단면가공기술, 신석기시대에 만들어 놓은 돌항아리기술,

스핑크스몸체제작(석회암 동체에 빗물골은 1만년전 시대로 해석) 등의 기술은 어디로

가고 중왕국시대부터는 고왕국시대 기술을 흉내낼 뿐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림9>기자피라미드 3개가 다 보이는 전경           <그림10> 쿠푸왕의 손자 피라미드와 3왕후무덤

 

4왕조 쿠푸왕과 그 아들 카프라(스핑크스 장제전의 주인)와 손자 멘카우라의 무덤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왔다. 손자 멘카우라 피라미드 우측에 있는 작은 3피라미드는

정비 3개의 것이라고 한다. 언덕에서 보는 새 개의 피라미드군의 조형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는 데, 그것들이 오리온좌 모습 그대로라니 신기하기 그지 없다.

 

  

 

<그림11>스핑크스밑 장제전 돌들의 코너 엇물림            <그림12>코브라모자관과 턱수염이 없는 스핑크스

 

스핑크스밑 장제전에 들어가 보면 햇빛들어오는 창과 그 큰 돌들이 <그림11>과 같이

면도날 하나 안들어가도록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옛적 고구려시대

석성쌓을 때 엇물려 놓듯한 저 돌들 물림을 보라. 그 기술이 대단하다. 그런데, 스핑크

스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머리 위에는 코브라장식이 앞면에 달려있는 관이 있었으며

턱에는 붕긋한 턱수염관이 있었는 데,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군들이 사격연습대상

으로 쏴서 떨어뜨렸다 하지 않은가.  문화대국이라고 하는 프랑스가 한 짓이 믿어지

쟎고 역겹다. 참고로, 스핑크스 몸통은 방사선동위원소측정을 하면 7000~10000

까지 나온다 한다.

 

  

  

       <그림13>카프라왕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림14> 향수 원산지로 유명한 이집트

 

 피라미드에 덧붙임돌장식이 남아 있는 것은 이제 카프라왕 것뿐인 데, 멀리서 볼수록 그

것은 마치 유리처럼 가공된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이집트의 현재 기술은 과거의 것

만 못한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다. 이튿날 올드카이로지역으로 가는 길에 향수집을 들리

자 한다. 이집트향수는 샤넬5 등에 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데 유럽 것들이 불을 붙이

면 화염을 내는 대신 이집트향유는 불이 붙지 않았다. 마사지향 등 여러 가지 좋은 게

많아 아들네 줄 것 등 한 두 가지를 사보았다.

 

 한 가지, 출애굽당시 이집트 파라오(거대한 집이란 뜻)는 람세스2세 또는 그 아들이었

다고 한다. 이 때에 파라오는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굽도록 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데,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에도 끌려간 것으로 잘못 아는 여행객들

이 많다고 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성경에 나와 있듯이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는

노역에 동원된 것이지 피라미드건축과는 무관한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이집트수도는 멤피스로서 모세가 이 곳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 파

라오 앞에서 10가지 기적을 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강대한 파라오들과 이슬라엘민족

간에 성경에서 저 유명한 출애굽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림15>예수피난교회와 모세기념교회 입구                 <그림16>입구 상가에서 본 피라미드 그림

 

예수피난교회와 모세기념교회 들어가는 입구에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옛 그림들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피라미드지역은 원래

 높은 산지대에 건축을 하여 물이 닿지 않았으나 아스완댐 이전에 큰 홍수가 나면

피라미드 앞까지 물이 차서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 그 앞까지 너른 강이 된 걸 찍어 놓

았다는 데 현지에는 비록 턱밑까지 도시화된 것은 알겠지만 사진을 믿기 어려울 정도

로 달라 보였었던 것이다.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밑둥까지 다 파내어 완벽한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사진 윗부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에는 모래로 다 파묻

힌 상태였다고 한다.

 

 한 가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있다. 이집트는 예전에 고어로 i-gipt라고 하였으며

gopt는 곧 이집트를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이 이집트에 대한 전도는 마가와 베드로가

다녀가고(벧전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들 마가 그리하

느니라, 여기서 바벨론은 지금의 올드카이로지역으로 현재도 그 명칭이 일부 남아 있슴) 폭발적인 선교로

한 때 인구의 70~80%가 기독교인이었던 것을 아는가.

 

 참으로 애석한 것이 641년에 회교가 들어와 세금정책 등으로 핍박을 당하면서 현재는

인구의 5% 정도로 줄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자기네들이 초대교회의 원형을 갖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이지만 현재의 빈곤국이 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여기에 나오는 마가는 68년경에 부활절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이교도들에 의해 순교

당하고 화형에 처해 졌으나 천둥번개와 비가 내려 시신은 온전히 보전되어 묻혔다가 9세기

에 베네치아상인이 그 유골을 돼지몸속에 숨겨 이탈리아에 산마르코성당을 세웠다 한다.

19세기에는 교황이 뼈 일부를 가져와 콥트 본교회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콥트교는 초대기독교의 원형이라고 자부할 만큼의 기독교라는 것이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다. 콥트교가 유럽기독교와 크게 다른 점은 1)수도원생활 및 2)유품과 유골을

중시하고 3)예수는 신이라는 단성론 외에 믿음에 큰 차이가 없다. 이 단성론 때문에 313

니케아공의회에서 이단이라는 배척을 받는다.

 

 

 

<그림17>예수피난교회(성서지우스교회) 주출입구  <그림18>모세가 마지막 기도를 올렸던 모세기념교회

 

 예수피난교회는 성서지우스와 마쿠스가 303년에 순교한 것을 기념하는 교회이기도

하다. 바실리카건축양식으로 되어 있고 1000년전에 실화되었으나 지금도 그 때 조성

1000년 지나 거무튀튀한 icon들이 즐비한 데 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얼른 모세기념

교회로 가자는 말에 발을 또 옮겨야 했다. 

 

 바로 이웃해 있는 모세기념교회는 이 곳에서는 벤에스라 시나고그로도 알려져 있는

,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기 전 이곳에서 기도한 바위장소라 하기도 하고 BC600

경에 예레미야가 이 곳에 왔었다가 다마네스(현 펠로지움)에서 순교했다 하며 1215

년경 에스라의 모세5경이 이곳에서 발견되어 졌다 한다.

 

 

 

<그림19>콥트교 성지 입구에서 보이는 고목나무   <그림20>콥트교도들의 무덤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이집트는 기독교의 부활신앙의 원조뻘인 오시리스가 언젠가 부활한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예수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부담감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사야

19장에 여호와께서 애굽에 임하시고 애굽인들이 가나안방언을 말하며 여호와를

위한 제단들이 서겠고 복주시리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이집트가 역출애굽이 될 만큼

기독교국가가 되는 역사가 있었는 데도 이슬람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른 것이 대단히

아쉽게 느껴졌다.

 

 참고로, 우리나라와의 수교는 1995년에 있었고 북한이 1963년도에 먼저 했다. 북한이

무바라크와 형제국가가 된 것은 김일성1973년 욤키푸르 중동전쟁때 당시 공군지원

(공군참모총장 무바라크) 등 군사지원을 한 것이다. 평양의 류경호텔을 다시 짓고 있는

것도 이집트 자본인 나깁 사위르스가 공사를 진행 중인 데, 북한에서 오라스콤을 통해

이동통신 사업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작금의 이집트 민주화투쟁을 곁에서 지켜보며 동아

시아의 오랜 친구 집안도 이제는 그만 막을 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림21>카이로서편에 가득한 무덤집                         <그림22>나폴레옹을 모방했던 술탄 알리의 모스크성

 

 희한한 일이었다. 이집트인들의 묘지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이따 보거들랑 얘기해

준다더니 도로를 따라 가면서 집들을 보며 저게 무덤이란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이집

트사람들은 영혼의 삶을 믿어 죽은 뒤에도 똑같이 생활할 수 있도록 방들과 수도, 화장실

까지 똑같이 만들어 놓았는 데, 오스만터어키 시대까지도 그러했다 한다. 시대가 어려워

지자 사람들이 생활이 편하도록 만들어진 묘지주택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는 데, 시신은

지하에 뼈만 추려 묻어두고 그 위에 산다는 것이다. 마을에 들어가 보면 회당도 있고 시장

등 없는 게 없다 한다. 그러한 묘지군이 시내에 가득하다.

 

 한 가지 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해가 나일강 동편에서 떠서 서편으로 지며 지하에는

또 다른 나일강이 있어 그 험한 곳을 지나 동편으로 해가 뜨므로 사람들은 나일강 동편

신성한 땅에 무덤을 만들지 않고 서편에 무덤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집을 지나면서 무하마드 알리 모스크가 멀리 보였는 데, 그는 나폴레옹에게서 영향

을 받아 근대화를 지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주변을 에워싼 성 석축과 함께 매우 견고

하게 보였다.

 

 

 

<그림23>외국인이 주로 찾는 칸앤칼릴리 국제시장     <그림24>칸앤칼릴리 시장의 뒷골목 모습이 한가롭다

 

여기도 저녁은 일찍 찾아와 시내를 돌아 다니다가 외국인이 많이 찾는 칸앤칼릴리

국제시장에 우리 일행을 내려 주었다. 주로 가볍게 이웃들에게 줄 토산기념품 등을

살 수 있었는 데, 식사시간이 되자 우리를 김씨네라는 한식당으로 데려다 주어 가지고

간 소고기볶음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을 수 있었다. 여기 호텔이나 식당에서 잘 나오는

게 걸레빵(정식 명칭은 에이씨빵)이라고 있는 데, 국가에서 80% 지원되는 피짜처럼

넓적한 빵이다. 만일 빵값이 비싸다면 이 사회주의공화국에서는 큰 일 날 사안이 되는

, 예전에는 우리돈 200원에 빵 20개 정도(현재는 5) 나와 집에서도 먹다가 남는 게

이것이라 빵으로 밥상위라든가 대충 닦는다 해서 교포들이 걸레빵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 한다.

 

 

 

<그림25>수에드운하 모형도                       <그림26> 시나이반도와 도로(하단 중간에 시내산)

 

 수에즈운하를 파려던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BC 2000년경 고대 이집트 제

12왕조의 왕인 세누세르트 1세는 나일강 동단의 지류의 요지인 자가지그에서 팀사호수

·비터호수를 거쳐 수에즈만·홍해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하였다. 이 운하는 계속 사용되다

8세기 이후에는 방치되어 토사로 메워졌다고 한다.

 

또한, 수에즈운하는 비극의 운하다. 이 운하를 파려던 왕은 사이드 파샤인데, 1869

수에즈운하를 개통해 놓고 배들을 통과시켰는데 무리한 공사로 재정파탄이 되어 왕권도

무너지고 공동운영하던 프랑스도 영국에 이 나라를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7

6일전쟁때 이스라엘에 져 고스란히 빼앗겼다가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다트에 의해

시나이반도를 되돌려 받게 된다. 골란고원을 빼앗긴 채로 머물러 있는 시리아보다는

현명하였던 것 같다.

 

 

 

<그림27>수에즈운하를 보호하고 있는 제방            <그림28> 수에즈운하로 들어가는 게이트와 형상

 

당시 캠프데이비드협정에 의해 노벨상까지 받으면서 돌려받은 시나이반도의 반환조건

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물론 평화협정이겠고 둘째, 시나이반도에서 채굴하는

원유의 50%를 원가로 이스라엘에 넘겨줄 것 셋째, 시나이반도 다합/누에바 인근까지

무비자로 자국민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라 하는 데 그래도 영토는 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미국으로부터는 년20억불씩 지원을 받게 되었다 한다.

 

 장정만 60만명을 넘었던 이스라엘자손들이 건넜던 홍해는 어디였을까? 일부 학자들은

홍해라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 바다는 너무 넓고(300km) 깊다(2200m). 물론 수에즈만

홍해의 폭과 깊이는 더 작겠지만 말이다. 홍해와 연결되는 바다 또는 지금은 연결된 큰

호수로 Reed Sea가 있다. 그 곳도 홍해의 일원이라 할 수 있으며 거기를 건너면 마라의

샘까지 사흘길(15:22)이나, 수에즈만 홍해를 건넜다면 마라의 샘이 홍해의 북단 맨끝

우측이므로 거꾸로 올라가야 돼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돌항아리 4000년전.shs
0.52MB
피라미드내 오리온좌향 통로.shs
0.6MB
피라미드내 오리온좌향 통로.shs
0.6MB
돌항아리 4000년전.s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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